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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가벼운, | 글로벌 힐스 _ 범위의 축소, 교류의 확장

글로벌,

가벼운,

글로벌 힐스 _ 범위의 축소, 교류의 확장

 

 

권혁수 선생님(이하 권) : 지금부터 얘기할 ‘글로벌’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터내셔널’의 개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일러스트레이션에서 ‘글로벌’이라 함은, ‘내’ 안에 있는 세계의 중심을 높이 두고 전세계적으로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1980~90년대 까지만 해도 인터넷과 여러 과학 기술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화란 으레 19세기 때의 방식(국가 간 물류를 교환할 때 기차를 통해 러시아를 거쳐 이동하듯 작가 또한 일본을 거쳐 연결되던 방식)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라는 시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우리나라의 전주가 갑자기 뜬금없이 교류할 수도 있다. 즉, ‘국가’라는 거대한 개념이 아닌 ‘촌’이라는 촌락 단위의 커뮤니티가 서로 파격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20세기에 이런 식의 네트워크가 앞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측했으며, 그렇게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글로벌’의 개념이 지금보다 전 시대에서 비롯된 개념이라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이것을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터내셔널이라는 거대한 개념 안에서 생각한다면 버겁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앞서 말했듯 ‘글로벌 빌리지’-즉 지구촌이라는 개념에서 생각해본다면 마치 내가 지금 사는 동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다른 동네로 갈 수 있는 길목이 보이는 것 마냥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선배들이 생각했던 방식들(우상으로 여기던 사람을 아예 만날 수 없거나 앞으로 30년 쯤 뒤에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등)을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을 때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인데, 바로 이것을 실천한 분이 이인수 선생님이다. 하지만 이인수 선생님을 만나보기 전에 글로벌 빌리지의 관점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자료, SBS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아름다울 美-3부(美는 자유다)’를 먼저 감상해 보자.

매년 8월, 뜨거운 미국 사막 한가운데,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 블랙 록 시티(Black Rock City)가 펼쳐지는 예술 축제가 있다. 바로 ‘버닝맨 페스티벌(Burning Man Festival)’. 축제를 함께하는 수만 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예술가, 다양한 캠프 운영자, 자원봉사자 등으로서 함께 축제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축제 기간인 일주일이 지나면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축제가 끝날 무렵인 토요일 밤에 축제를 상징하는 거대한 나무 인물상을 불태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서 ‘버닝 맨’이라는 축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 축제의 핵심은 사람들 각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서로 소통하고 즐기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공동체, 예술, 자기표현, 자립성에 전념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하나의 공간(global village)인 것이다.

 

 

권혁수(이하 권) :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국 우리 예술가들은 21세기가 추구하는 사회가 과연 무엇이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이 사회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술가들 또한 이런 것을 해결하는데 예술작업으로서 동참해야 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예술이 그런 역할을 계속 해왔듯이 말이다.
 

이인수(이하 이) : 권 선생님 말씀에 좀 더 이야기를 보태자면, 아는 지인 중에 마크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도 이 ‘버닝맨 페스티벌’에 참가를 했었다.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바로 이 페스티벌을 통해 자신이 얻는 것은 ‘위로’와 ‘위안’이라고.. 그래서 이 축제에 참가하고 나면 너무 행복해진다고 한다. 이 친구 또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데,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와 같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있고, 그들의 일러스트레이션 또한 축제의 일부분으로 녹아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권: 일러스트레이션을 단순히 ‘국제적으로 거듭나기 위함’ 이라는 개념의 글로벌로 이해하지 말고 ‘너’의 중심과 ‘나’의 중심이 만나 교류하는 즉, ‘자유’, ‘위안’, ‘위로’, ‘나눔’의 의미에서의 글로벌로 이해하자. 일러스트레이션을 비롯해 여러 예술장르에 대한 무수한 예측들은 모두 20세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제 21세기가 된지 15년이 흘렀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잘 주목해야 한다. 20세기의 예측에서 만들어진 질서와 규칙들을 무시하고 치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의심하고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될 수 있다면 오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만큼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모든 것을 백지화시키고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21세기의 예술가는 파울 끌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 서로 위로하고 소통하며 대화할 수 있고, 실제적으로 우리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예술가를 바람직한 상으로 규정해야 한다. 여태까지 내가 이야기했던 부분이 좀 더 관념적인 것들이 많았다면 앞으로 이야기할 이인수 선생님은 좀 더 구체적인 것에 대해 짚어줄 것이다.
 

이: 아까 영상에서 봤었던 중요한 키포인트 중 하나가 바로 ‘나’였던 것 같다. ‘자유’, ‘위안’, ‘평화’ 등등 이런저런 좋은 개념의 말이 있었지만 이런 개념들도 ‘내’가 빠져있으면 정말 자유로운지, 위안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앞으로 작가생활을 해나가면서 ‘나’에 대한 개념을 더 잘 이해하고 준비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뉴욕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이야기하는 주제가 주로 ‘사는’ 문제인데, 그 이야기 안에서 ‘내’가 확인이 될 때가 많다. 여러분도 지금껏 경험해왔던 것 뿐 아니라 앞으로 경험할 무수한 일들을 나름의 방법대로 기록해 두면 나중에 작업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멀리서 무언가를 찾지 말고 항상 가까이 있다 생각하고 ‘내’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많이 하길 바란다.

요새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부터 경험 많은 노장 일러스트레이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을 방문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이 ‘글로벌 빌리지’안에서 많이 세계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나’를 포함시킬 수 있는 커뮤니티가 어디에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때 너무 국내에만 국한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여러분은 한국인이라는 문화코드를 가지고 있고 분명 글로벌 커뮤니티 안에 섞여 들어갈 수 있다. ‘나’를 분명히 드러내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 ‘글로벌 빌리지’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권: 96년에 ‘이인수’라는 작가가 미국으로 가서 아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기록을 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써놓은 글을 보면 이인수 작가가 그 당시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계에서는 대표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가 떠났을 때 그를 대체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사실 그 때 일러스트레이션은 약간 천편일률적인 면이 있었다. 선으로 반듯하고 깔끔하게 그리는 식이었는데, 물론 그런 그림들 또한 필요하지만 너무 많았을 뿐 아니라 그냥 예쁘기만 하다 보니 아무런 고민도 없고 생각도 없는 그림이었던 것 같아 그런 것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가기 전에 여러 가지 재료로 다양하게 시도 해보았던 것 같다.

사실 한국에 있는 동안 내 자신에게 제한을 많이 해놓았던 것 같았기 때문에 뉴욕에 갔을 때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 동부 쪽이) 생각보다 보수적 전통이 있었다. 말하자면, 아주 구체적으로 세분화 되어있는 시스템이어서 캐릭터에 약간의 변형만 주어도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한 가지만 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 깨닫고 보니 오히려 서울에서 더 자유로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갈등을 거치고 나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제 그 현장을 알고, 속성을 아니까 거기에 어느 정도 맞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뉴욕 신문에 그렸던 내 그림들을 보면 한국에서처럼 재료나 스타일을 바꾸지 않고 쭉 일관된 그림체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예전부터 ‘미디어 확장’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보니 내가 할 일들이 보였다. 무대 디자인도 그런 일들 중 하나였는데, 그냥 무대를 디자인을 한다는 개념이 아닌 무대를 매체로 한 하나의 일러스트레이션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생활용품에 들어가는 디자인을 맡아서 한 적도 있고, 그림책도 내 보고, 영화사에서 의상과 소품을 디자인하는 일 등, 다양한 일을 하게 됐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의 매체들 즉 출판, 영상, 광고에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분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권: 이인수 작가가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사진이 디지털화되기 시작하면서 일러스트레이션들보다 훨씬 유용하고, 포토샵을 이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점이 디자인 프로세스 안에서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러스트레이션이 서서히 출판, 광고, 영상 매체에서 2위로 밀려나기 시작했는데, 그런 중에 그림책 ‘노란우산’의 작가 류재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이 비평가로서 썼던 나의 글들을 읽어보시더니, 바로 ‘그림책’이 주체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과 관련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며 그림책 문화운동을 같이 시작해보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서 몇몇의 작가 분들과 함께 그림책 교육 공동체를 만들게 되었다. 그 후로 그림책 워크샵을 열기 시작했는데, 즉 이 뜻은 죽어가던 일러스트레이션에 그림책이라는 또 다른 미디어 매체가 등장했다는 말이었다.
 

이: ‘매체의 확장’이라는 개념이 새롭다기 보다는 예전에 나왔던 개념들인데 지금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 이리저리 치이고 부딪히면서 여기까지 되었는데, 그런 상황들이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매체가 있을 텐데 나 또한 그랬다.

그 중에 한 곳인 뉴욕 타임즈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를 이야기하자면, 그 곳에서 일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다보니 더 이상 못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인 즉, 내가 그림책을 하면서 받았던 간섭들을 거기서도 똑같이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대단한 곳에서 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과연 이 일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결코 큰 의미를 차지하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서울에 있는 여러분들이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틀이 너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이나 캐나다, 남미 쪽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틀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불모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원하는 작업들을 계속 해 나아갔으면 한다.
 

권: 여기서 잠깐 이야기하자면, 사실 그림도 중요하지만 글도 중요한데, 힐스 선생님들은 다들 글을 쓴다. 글을 잘 써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할 수 없는 얘기를 글로 쓴다. 그 점이 독특한데, 특히 이성표 선생님이 쓰신 선언문을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성표 선생님이 진행하는 포스트 프로그램인 ‘불꽃’처럼 힐스의 모든 프로그램이 사실은 길들여지지 않는 불꽃이길 바란다.
 

이: 힐스를 졸업하면서 그림책 한 권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말고 그 보다 좀 더 큰 꿈을 가졌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실력을 키워야 한다. 계속 반복해서 작업해라. 작업이라는 것이 거창하게 큰 사이즈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상시에 마치 칼을 연마하듯 자신을 연마하길 바란다. 낙서부터 시작해 보자. 조그마한 노트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느껴보면서 그려보아라. 글을 써도 좋다. 결국 습관화를 해야 한다. 반복해라. 누군가를 따라하지 말고 조금 어눌하더라도 자기 작업을 하길 바란다. 그냥 자기 선을 계속 반복해서 연습해라. 물론 다른 작가의 작품을 카피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낙서부터 시작하더라도 반복적으로 자신의 조형을 만들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내’가 해석하는 ‘세상’과 ‘사물’에 대해서 고민해 보아라. 반복적인 연습을 통한 기술연마와 ‘세상’과 ‘사물’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좋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쪼록 공동체로서 이런 대화의 장이 많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일러스트레이션은 가벼움이다’라는 통상적으로 느껴질 수 도 있는 말에 대해 이인수 작가는 ‘깃털같이 가볍고 자유로우며,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의미의 가벼움’을 뜻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이런 ‘가벼움’을 실천해 보았으면 하고,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는 우리들이 참 위대하다고 느낀다. 이것으로 이번 ‘글로벌 힐스’는 마치겠다.